면도기 손잡이나 전동드릴을 쥐었을 때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립감은 형태의 곡률만큼이나 표면을 이루는 소재의 경도와 질감이 결정하는 감각이고, 이를 다루는 재료가 바로 러버와 엘라스토머다. 딱딱한 플라스틱 바디 위에 이 소재를 어디에, 얼마나 얹느냐가 제품을 손에 쥐었을 때의 첫인상을 가른다.
1. 경도라는 숫자가 결정하는 촉감
고무나 엘라스토머 소재는 쇼어 경도(Shore hardness)라는 수치로 무르고 단단한 정도를 표시한다. 숫자가 낮을수록 손가락으로 눌렀을 때 더 깊이 들어가는 무른 소재이고, 숫자가 높을수록 단단해서 딱딱한 플라스틱에 가까운 촉감을 낸다. 같은 형태의 손잡이라도 경도를 몇 단계만 바꾸면 손에 닿는 느낌이 전혀 다른 제품처럼 달라진다. 그래서 그립 부위를 설계할 때는 형태를 확정하기 전에 목표로 하는 경도 범위부터 정해두는 것이 순서에 맞다.
깊게 눌리는 말랑한 촉감, 접지력은 좋지만 내구성과 형태 유지력은 낮아진다
단단하고 오래가는 촉감, 대신 말랑한 쿠션감과 접지력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2. 투샷 성형이 만든 두 소재의 결합
단단한 플라스틱 바디에 부드러운 그립을 결합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투샷 사출(2K molding)이다. 딱딱한 소재로 먼저 뼈대를 사출한 뒤, 같은 금형 안에서 연질 소재를 이어서 사출해 두 재료가 화학적으로 결합되도록 만드는 공정이다. 접착제로 붙이는 방식보다 내구성이 높고 이음매도 깔끔하지만, 두 소재의 경계가 정확히 맞물리도록 금형을 설계하는 난이도가 높아 초기 개발 비용이 커진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 실무 포인트 — 투샷 성형을 적용하기 전에는 두 소재의 접착 궁합부터 확인해야 한다. 모든 경질-연질 조합이 화학적으로 잘 붙는 것은 아니어서, 소재 공급사가 제공하는 상용성 데이터를 반드시 검토한 뒤 설계에 들어가야 나중에 박리 문제를 피할 수 있다.
3. 실존 브랜드의 그립 설계
필립스의 전동칫솔 손잡이나 무선청소기 다이슨의 스틱형 손잡이는 손이 닿는 면적과 힘이 가장 많이 실리는 지점을 미리 분석해, 해당 부위에만 연질 소재를 배치하는 방식을 쓴다. 손잡이 전체를 부드러운 소재로 감싸는 대신, 실제로 쥐는 접점에만 선택적으로 그립을 넣어 원가와 촉감을 동시에 관리하는 전략이다. 로지텍의 마우스 역시 손바닥이 닿는 옆면에만 러버 코팅을 넣어, 미끄러짐을 막으면서도 상판은 매끈한 플라스틱 마감을 유지하는 절충안을 택한다. 접점을 좁혀 소재를 아끼는 선택은 단가 절감뿐 아니라, 전체를 감쌌을 때보다 오히려 절제된 인상을 남긴다는 디자인적 이유도 함께 작용한다.
접점 분석 — 실제 사용 동작에서 손이 닿는 면적과 힘이 실리는 지점을 파악한다
경도 목표 설정 — 접점의 용도(쥐는 힘, 사용 시간)에 맞는 쇼어 경도 범위를 정한다
선택적 배치 — 손잡이 전체가 아니라 필요한 접점에만 연질 소재를 배치해 원가를 관리한다
4. 흔한 실수 — 시간이 지나면 끈적여지는 소재
초기 샘플에서는 촉감이 좋았던 연질 소재가 몇 달 뒤 표면이 끈적여지거나 색이 누렇게 변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가소제가 소재 표면으로 서서히 배어 나오는 현상, 이른바 블루밍(blooming) 때문인데, 저가 소재를 그대로 쓰면 실사용 환경에서 뒤늦게 불거지는 문제다. 시제품 단계에서 고온·고습 환경에 일정 기간 노출시키는 내가소제이행 테스트를 거치지 않으면, 양산 이후에야 이 문제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밝은 색상의 연질 소재일수록 변색이 눈에 띄기 쉬우므로, 색상 결정 단계에서부터 내후성이 검증된 원료인지 확인해두는 편이 안전하다.
5. 마감 질감이 더하는 또 하나의 변수
같은 경도의 소재라도 금형 표면에 새기는 텍스처(시보)에 따라 촉감이 다시 한번 달라진다. 매끈한 무광 표면은 부드러움을 강조하지만 땀이 묻으면 미끄러워지기 쉽고, 자잘한 돌기를 새긴 표면은 접지력을 높이는 대신 오래 쥐고 있으면 손바닥에 눌린 자국이 남을 수 있다. 습기가 많은 환경에서 쓰는 공구나 운동기구라면 배수와 미끄럼 방지를 동시에 고려한 패턴을, 실내에서 짧게 쥐는 소형 가전이라면 부드러운 무광 마감을 우선하는 식으로 사용 맥락에 맞춰 텍스처를 골라야 한다.
무광 스무스
부드러운 촉감, 실내·단시간 파지에 적합하지만 땀에는 약하다
돌기 텍스처
접지력이 강해 습한 환경이나 장시간 파지에 유리하다
마치며
그립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제품을 처음 손에 쥐는 그 순간 가장 먼저 평가받는 요소다. 경도 수치 하나, 접점 하나, 표면 텍스처 하나를 세심하게 고르는 일이 결국 사용자가 “손에 잘 맞는다”고 느끼는 감각을 만든다. 눈으로 보는 CMF 못지않게, 손으로 확인하는 CMF도 초기 단계부터 함께 다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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